[천자 칼럼] 블라디보스토크의 재발견

입력 2019-08-14 17:38  

[ 고두현 기자 ] 러시아 최남단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를 찾는 한국인이 최근 한 달 새 두 배로 늘어났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른 반작용으로 근거리 대체 여행지를 찾아 나선 관광객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공항과 주요 상점에 한글 안내판이 등장했고, 물건값을 한국 돈으로 받는 가게가 생겼다. 대형 쇼핑몰에는 한국 식품 전용 코너도 마련됐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반이면 가 닿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도시’다. 한여름 기온이 20도 안팎으로 선선해서 피서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주요 관광지인 시베리아 횡단열차 종착역과 혁명광장, 니콜라이 개선문 등에 한국인이 넘친다. 맛집과 카페가 많은 아르바트 거리,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생가도 인기 코스다.

이 도시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정복하다’라는 뜻이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이다. 해군 함대가 들어선 군사적 요충지지만, 최근에는 자유무역지대로 지정돼 경제적인 역할이 커지고 있다. 한·러 수교 후 발 빠르게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건설 기계 유통 금융 분야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연해주의 중심 도시인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한인들의 항일 거점이던 이곳 신한촌(新韓村)에서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한 달 빠른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가 출범했다. 인근의 우수리스크에는 함경도 노비 출신으로 자수성가해 전 재산을 항일운동에 바친 최재형 선생 생가가 있다. 그의 후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기념비, ‘헤이그 밀사’ 이상설의 유허비도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흔적까지 만날 수 있다. 발해 5경 12부 중 하나인 솔빈부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 한인들이 처음 이주한 것은 1860년대다.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 우리 조상들은 황폐한 땅에서 벼농사를 짓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제의 약탈과 기근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과 합심해 독립운동을 도왔다.

지금도 밭을 갈면 발해 시절 기와 조각이 출토되는 우리의 고토(古土). 한때는 중국 영토였다가 근세기 러시아의 군사항으로 변신했던 이곳이 국제경제특구와 한국인의 관광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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